신이 필요 없는 세상 타오스

그들만의 영적인 세상. 타오스를 방문하며 느껴지는 첫인상이었다. 인간은 왜 신이 필요한 것인가. 무엇인가를 깊이 요구할 대상이 필요해서가 아닐까.

타오스(Taos)는 뉴멕시코 주 북쪽에 있는 마을로 고원지대의 넓은 광야를 앞에 두고 높고 푸른 상그레 데 크리스토(Sangre de Cristo)산을 뒤에 두고 있다.

타오스의 위치는 산타페(Santa Fe)에서 약 69마일 북쪽이 되며 도시 평 균 고도가 7000피트가 되는 고원지대이다. 타오스의 북쪽에는 인디언 마을, 타오스 푸에블로(Taos Pueblo)가 있는데 이 푸에블로는 1000여년의 역사를 가졌고 지금 도 주민이 거주하고 있는 마을로서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Site)으로도 지정된 푸에블로다.

타오스가 특별히 널리 알려지기 시작 한 것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러서 미술가들이 매력적인 이지역의 자연에 이끌려 이주 해 와서 타오스의 경치와 푸에블로 인디언을 대상으로 한 작품을 많이 발표 한 것으로 인해서 타오스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유럽과 미국에서 공부한 서양화가들이 많이 이주 해와서 타오스에 미술가의 부락(Art Colony)이 형성되게 되었다.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미술을 좋아하는 관광객이 더 늘어나고 갤러리 또한 늘어나서 작은 산타페같은 미술의 마을로 발전되었다. 인구는 4천7백명 정도에 불과한 마을인데 갤러리 수는 80개가 넘는다. 여름철 관광 시즌이 되면 인구는 1만5천 명 정도로 늘어난다.

인간이 자연속에서 살아가기에 가장 바람직 한 조건을 두루 갖춘 이곳 푸에블로에 신이 필요 없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이유는 대체로 모든 인디언들의 바램 이었던 물이 풍족하게 흐르는 강이 마을 한 복판으로 흐르고 있었다.

리오그란데 강물의 발원지중 한곳인 해발 6,500피트의 높은 산 상그레 데 크리스토(Sangre de Cristo)마운틴의 겨우내 쌓였던 눈이 녹아 흘러내리며 훌륭한 식수원이 되고 레드 윌로우 크릭(Red Willow creek)이라는 마을 한 복판으로 사철 흐르는 강물엔 브라운트라웃(송어)이 많이 살고 있어 주민들이 풍요로움을 느끼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타오스의 푸에블로에는 키바(Kiva)라고 부르는 신전이 없었다.

땅속을 깊이 파고 지붕으로 출입구를 만들어 사다리로 들락거리는 그 신전에는 매우 신성시하여 여자나 어린아이들은 들어 갈 수가 없는 곳이었는데, 이곳 타오스에는 키바에서 모시던 태양신 대신에 일찍이 유럽의 문명과 함께 도입된 성당이 지어져 현대식 종교가 이미 1600년대 초기부터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미국에 흩어져 있는 인디언의 보존구역 중 이곳 타오스의 푸에블로 처럼 많은 예술 작품 속에 등장을 한 건물은 없다. 1450년에 지은 이곳의 전통 어도브 가옥은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며, 5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훌륭한 보존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넓은 공터를 두고 가장자리에 촘촘히 들어찬 어도브 가옥은 마치 도자기 장인이 점토 블록의 모서리를 매끄럽게 다듬은 후 차곡차곡 쌓아 올린 작품처럼 보인다.물론 이 역사적인 전통 건물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해마다 흙벽을 다시 바르는 수고로움이 이어지고 있는 덕이다.

1992년 유네스코는 타오스 푸에블로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이 어도비 흙벽돌 건물에 2006년까지 약 150명의 주민이 상주하고 있었으나 오늘에 와서는 불과 20명이 이곳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타오스 푸에블로에 속한 인디언의 인구는(2016년 현재) 1,900명이며 대부분의 주민은 마을 밖 인디언 보호구역 내에서 현대식 주택을 짓고 살고 있지만 전통을 보존 하기위해 어도비 건물안의 집을 하나는 소유하고 명절과 종교 예식이 있을 때만 프에블로에 있는 집에 와서 예식에 참여하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이 건물은 2층부터 5층으로 지어져 있는데 모두 400여개의 방을 가지고 있으며 높낮이가 각각 다른 것은 엘리베이터 대신에 지붕으로낸 출입구 때문이다.

인디언들의 건축물중 빼 놓을 수 없는 하나의 기구가 바로 사다리인데 출입구에 세워 집으로 들어가기 위한 도구이기도 하고 벽으로 출입구를 내지 않는 것은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다리의 양쪽 길이가 다른 것은 내리고 타기 쉬운 아이디어를 반영했다고 하니 단순해 보이는 어도비 스타일의 건물은 이들 인디언들에게 꼭 맞는 주거형태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옛 방식대로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며 살고져 하는 순수한 자연인인 이들은 태양 빛에 의존하며 하루를 보내고, 마을 중심에 흐르는 강물 레드 윌로우 크릭(Red Willow Creek)에서 식수를 끌어다 쓴다. 자연에 순응하는 삶에 불편을 느끼는 건 문명사회에서 건너온 이방인 뿐이다. 이곳은 전기와 수도, 배관 설치를 금하고 여전히 옛 방식으로 살아가를 원하는 주민 자치회가 있다. 최근에 이들은 인터넷 연결을 위한 공사가 진행 중이다.

연간 약 10만명의 관광객이 다녀간다고 하는 이곳은 3월과 4월 사이에 그들의 종교행사로 약 6주간 관광객이 들어갈 수 없다. 필자는 3번의 무모한 도전 끝에 드디어 2일전에(3월 25일에) 오픈을 한 이곳을 운 좋게 돌아 볼 수가 있었다.

종교를 앞세워 도시를 건설하고 교회를 세우던 스페인의 선교사들에 의해 일찍이 1600년도 초기에 교회가 세워진 이곳, 신전이 필요 없을만큼의 이 평화스러운 낙원에도 1675년에 와서는 고유의 종교의식에 박해를 가하는 일이 일어났다.

1598년 스페인의 오냐테(Onate)장군이 이끄는 뉴멕시코 원정팀이 올라와서 리오그란데 강 상류 지역에 스페인 이주민을 정착 시키면서 푸에블로는 스페인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그들에게 기독교를 선교하는 활동도 시작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종교를 거부하는 원주민의 세력도 컸다. 아코마(Acoma)푸에블로 인들과의 갈등으로 10여명의 스페인 사람들이 죽게 되자 보복으로 아코마를 공격하여 600여명을 죽이고 항복을 받아낸 뒤에도 25세 이상의 남자들은 전부 그들의 발목 하나를 잘라 버리는 잔인한 처벌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이주해온 스페인 이주자도 그의 통치에 불만을 갖게 되었다.

스페인의 왕은 이런 사실을 알고 오냐테를 소환하고 페드로 데 페랄타(Pedro de Peralta)를 1609년 임명했다. 그 이듬해 페랄타는 산타페를 수도로 정하고 이 지방을 다스렸다.

스페인사람들은 푸에블로 인에게 개발된 농기구를 제공해주고 그들이 가져온 소, 말, 양을 기르게 했고 밀, 양파, 사과 등의 농업기술을 가르쳤다. 스페인 군인들은 이방인, 즉 나바호와 아파치인디언이 푸에블로 부락을 침입하는 것을 막아주는 보호자 역할을 해 줌으로써 상호 의존의 혜택을 주고받아 평화를 유지해 나갔다.

1670년에 이르러 심한 가뭄으로 식량난을 겪은 데다 스페인 사람들과 접촉으로 인한 유럽에서 들어온 여러 가지 병이 푸에블로 인디언에게 퍼져서 면역성에 약했던 이유로 인해서 인디언의 사망률이 높아 인구의 급작스런 감소가 있었다.

1675년에 와서는 고유의 종교의식에 박해를 가하는 일이 일어났다. 47명의 종교 지도자를 체포하고 4명에게 교수형 언도를 내렸다. 푸에블로 지도자 70명이 산타페를 쳐 들어가 협박하여 살아 있는 종교 지도자를 구출 해내긴 했으나 이로 인해 상호간의 갈등은 고조 되었다. 그때 석방된 자 중의 한사람인 포페이(Pope 혹은 Popay)란 산 후안(San Juan)푸에블로 인은 스페인 사람들의 통치에서 벗어날 계획을 세우고 여러 부족과 비밀리에 동맹을 맺고 1680년 8월10일 일제히 봉기하여 성당을 불사르고 사제를 죽이는 푸에블로 반란(Pueblo Revolt)을 일으켰다. 11일 동안의 격전 끝에 산타페는 2,500명의 병사의 승리로 푸에블로의 손에 넘어갔다.

산타페에 있던 3,000명의 스페인 사람들은 뉴멕시코 남쪽 엘파소로 피난을 갔고 스페인의 통치는 막을 내렸다. 주권을 되찾은 푸에블로인 들은 새로운 어려움에 부닥쳤다.

어느 부족이 산타페를 차지할 것인가란 질문에도 통일된 의견이 없었고 부족들 간의 거리가 너무나 원거리 여서 협력에 어려움이 있었고 8개의 다른 언어를 쓰고 있는 부족 간의 의사소통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포페이는 그 후 스페인 군인들의 두 차례에 걸친 공격을 막아 내긴 했으나 부족을 연합 시키는 일에는 힘이 부족했다.

1692년 디에고 데 발가스(Diego de Vargas)는 스페인 군인150명과 우호적 관계를 가진 군인 다수를 거느리고 다시 산타페에 무혈로 입성하여 지도자들과 평화적인 협상을 맺고 푸에블로 인디언은 스페인의 통치를 받으며 평화적인 관계를 갖게 되었다.

1821년 스페인의 통치는 끝나고 독립한 멕시코의 영토가 되었으나 1846년 멕시코-미국 전쟁이 일어났고 멕시코는 뉴멕시코와 애리조나, 캘리포니아를 포함한 남서부의 땅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미국은 1천5백만 불을 지불하고 푸에블로는 미국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연방정부는 새로운 도로를 건설하고 산림을 국유림으로 관리하게 되자 푸에블로의 권익에 피해를 주는 일도 생기게 되었다. 타오스 푸에블로에 흘러 들어오는 레드 윌로우 강의 근원지인 블루레이크 (Blue Lake)가 국유림으로 들어가 그의 소유권을 놓고 60여 년간 법정투쟁을 벌린 결과 타오스 푸에블로가 1970년 승소한 것은 하나의 좋은 사례가 된다.

500년 전에 스페인인들에 의해 세워졌던 교회가 종루만 남은 채 지금은 묘지로 쓰이고 있었다. 이미 1세기 이전의 사람들이 주검을 맞았고 그 이름이 남겨진 묘비를 보며 잠시 세월의 무상함과 격세지감을 느끼기도 했다.

미국의 건국 역사가 불과 240여년에 불과 한 것을 생각할 때 이미 500년도 더 전에 이곳에 교회를 세웠던 스페인 인들의 역사 또한 우리가 보존해야 될 것 같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1900년도 초기 타오스에 많은 예술가가 모여 살게되고 또 미국 전역에 타오스가 널리 소개된것은 아마도 매블 다지 루한(Mabel Dodge Luhan)이란 여인이 타오스에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녀는 뉴욕의 부유한 은행가의 딸 이였고 작가 이면서 이탈리아 플로렌스(Florence)에서도 살았고 뉴욕에 돌아와서 그의 살롱(Salon) 을 통해서 많은 저명인사와 교류하면서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일을 많이했다.

1919년 타오스로 이주해 와서 집과 토지를 매입했는데 이때 타오스 푸에블로 인디언인 토니 루한(Tony Lujan)을 알게된다. 토니는 인디언 천막 티피(Teepee)를 매블의 집앞에 새워 놓고 기거하며 매일 저녁이 되면 북을 두드리면서 구혼을 청했다.

1923년 결혼하여 1962년 사망할 때까지 함께 40년을 살면서 이 내외는 무수히 많은 예술가를 초청해서 그의 집에 머물게 하고 타오스로 이주해온 예술가들을 돕고 후원했다.

이곳을 다녀간 예술인들 중에는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사람이 많다. 예를 들면 영국 작가로 D. H. 로렌스(Lawrence), 올더스 헉슬리( Aldous Leonard Huxley), 스위스 심리학자 카를 융(Carl Gustav Jung), 화가로는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 니코라이 페친(Nicolai Fechin), 사진작가 안셀 애덤스(Ansel Adams)등이 있다. 1991년 매블이 살던 이 집은 미국역사기념물(National Historic Landmark)로 지정되었고 일반에게 공개되며 여관(Bed &Breakfast Inn)으로 쓰이고 있다.

매블 루한의 일생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를 미국의 PBS-TV에서 방영할 목적으로 앨버커키에 있는 교육방송 KNME-TV의 도움을 받으며 제작되어 2012년 여름에 방영되기도 했다.

타오스를 보다 더 높은 문화적인 주거지로 끌어 올린 또 한사람의 공헌자 레이놀스.

그는 폐품을 이용하여 자유로운 방식으로 건축을 하고 태양열을 이용하여 친환경적인 삶을 만들어 가는 마치 가우디의 건축물 같은 재미나는 건축물인 [어스십] 건축물의 개발자이다.

그의 이러한 발상은 도시를 떠나 자유롭게 살아가고 싶은 타오스의 보통 사람들은 물론이고 많은 예술가들에게 호평을 얻고 있어 어스십 건축물들은 점점 늘어 가고 있고 언젠가는 타오스의 명물로 많은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모으게 할 것이다.

어스십 하우스의 벽체는 모두 폐타이어와 유리병을 벽돌처럼 쌓아 완성한 것이다.

때때로 벽체에 눌려 있는 형형색색의 유리병 밑바닥이 빛에 반사되어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빛난다. 쓰레기 더미에서 잠자던 맥주 캔과 깨진 타일은 가우디 건축처럼 독특한 외관을 치장하고 있다. 실내는 과학 실험실처럼 모든 것이 자연의 원리로 빈틈없이 움직인다. 집의 구조는 간단하다. 지붕의 남향으로 태양광 패널을 설치해 태양에너지를 받을 수 있는 최적의 구조를 만들고, 경사면에 설치된 집열판과 건물 외벽의 풍력 터빈으로 온수와 자체 냉난방 시스템을 가동하는 것이다. 밖에서는 빗물을 저장해 펌프로 오수를 분류하고, 집에서 사용한 물은 파이프를 통해 정원으로 흘러들어가 식물에 물을 주는 데 사용한다. 자체 에너지 생산과 재생은 어스십 건축이 지향하는 제일 덕목이 다. 레이놀스는 1980년대 말 타오스의 넓은 황무지를 시험 무대 삼아 어스십 건축을 처음 선보였다.

현재 이곳에는 크고 작은 어스십 하우스가 72채 모여 있고, 그의 친환경적 건축법은 전 세계로 뻗어 나가는 중이다. 자급자족 주거는 곧인디언의 삶을 사는 것이고 앞으로는 태양이 비치는 어느 곳이든 집을 지을 수 있고 인간들이 버리는 모든 폐품들이 건축 재료가 될 수 있다는 그의 심오한 건축 철학은 플라스틱과 쓰레기로 마치 진흙 속에서 연꽃을 피우는 멋진 발상으로 보인다.

타오스를 알리는 예술적인 건물 중 이 교회 건물을 빼 놓을 수가 없다.

타오스 에서 남쪽으로 3마일 떨어진 곳에 랜초스 더 타오스(Ranchos de Taos)란 마을이 있다. 이곳에는 유명한 샌프란시스코 아시스교회(San Francisco Asis Church)가 있다. 1810년에 세워진 어도비(Adobe)스타일의 건물이다.

많은 화가와 사진작가들에 의해서 널리 알려진 교회이다. 조지아 오키프는 스페인 이주자들이 세운 건물 중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라고 칭찬을 했고 그가 이 교회를 그린 여러 장의 작품이 남아 있다. 사진작가 안셀 애덤스도 이 교회를 찍은 작품을 남겼다. 이 독특하게 지어진 교회건물은 1970년 미국역사기념물로 등록되었고, 세계문화유산 교회로도 등록되었다.

끝으로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 된 타오스 푸에블로(Taos Pueblo)가 매년 개최하는 축제를 소개한다. 인디언 축제 중 가장 많이 알려지고 관광객도 가장 많이 찾아가는 곳이다. 축제일(Feast Day)은 9월 30일이며 사진촬영이 가능하다.

인디언들의 현대문명에 대한 거부 중 카메라를 들이대는 행위인데 이들이 인쇄 한 주의사항이 입장권에 적혀 있다. 그러나 9월 30일에 열리는 대축제일에는 누구라도 함께 참여를 할 수 있고 사진촬영 또한 자유다.

위대한 푸에블로들의 댄스 행렬에 같이 끼어 우리도 하루 자연인이 되어 신나게 한번 놀아 볼 수 있는 파티 날인 것이다. 참고로 타오스 푸에블로의 입장권은 $13이고 이곳은 어린이도 학생도 시니어도 똑같이 평등하게 적용되는 인디언식 법이 있었다.

Writer_ Joyce Lee (조이스 리)
하는 일 : 2008년부터 현재까지 Art Magazine
Reporter
...한 일 : 한국과 LA에서 사진전 10여 회
...저 서 : 2012년 여행 에세이 <지구별 한 귀퉁이에 서서> 펴냄
2014년 사진 에세이 <나의 전생은 인디언> 펴냄
2016년 여행 에세이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