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섬진강에서 태어난 대하소설 토지

내가 박경리 문하로 오래 출입하게 된 인연은 소설가와 애독자 사이의 만남이었다. 30대까지도 나의 독서가 줄곧 학위 공부 중심의 좁은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1980년 봄인가 우연히 아내가 읽다가 쌓아둔, 그때 3부까지 나왔던 토지를 집어들었다. 들자마자 푹 빠져 단번에 읽었다. 그러는 사이 작품이 더욱 좋아졌음은, 우리가 사투리라고 낮게 치는 지방 말이 이렇게 문학이 되는구나, 그런 깨달음 때문이었다. 토지의 주인공들은 통영·하동·진주 등 경남 남단 해안가의 말을 구사한다.
솔직히 우리 근대문학 김유정을 좋아해도 강원도 옛 지방 말을 제대로 느끼지 못해 단편을 읽고서도 절반밖에 즐기지 못했다. 나와 동시대 사람인 '관촌수필'의 이문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서산반도 쪽 그 이 말 역시 반밖에 실감하지 못했다. 이런 안타까움을 지녔던 독자가 제 입에 딱 붙어 있는 사투리 말투로 적은 큰 문학을 만날 때의 감회는 짐작할 만하지 않겠는가.
보름 만에 세 번 독파했다. 그걸 토대로 적어낸 '소설 토지의 인물들과 오늘의 도시생활'이란 글이 월간지 '뿌리 깊은 나무'에 실렸다. 이 일의 연장으로 원주 나들이를 나섰다. 그렇게 작가를 처음 만난 것이 1983년 봄이었다. 사회과학적 풀이를 보탰던 글이 좋았다며 아주 반겨주었다. 급히 점심상도 차려냈다.

'토지' 완간 기념식에 노구의 정주영 참석

박경리는 1971년에 유방암 수술을 받고 붕대로 수술 자리를 동여매고도 집필을 멈추지 않았던, 등장인물만 800여명인 '문학의 만리장성'이 완성되자 각계의 찬사가 잇따랐다. 현대 한국에서 대형 건물, 중화학 공장, 고속도로 등의 건설 완공 준공식은 흔했지만 문학작품의 완간 기념식은 전례 없던 거사였다.
대하소설은 19세기 말 경상도 땅 하동 평사리에서 벌어지는 추석 잔치 마당을 정경으로 막이 오른다. '시작은 끝을 예감한다'라는 말대로 1994년 10월 8일 역시 청명한 가을날 작가의 단구동 집에서 대하소설 완성을 경축하는 잔치 마당이 올려졌다. 잔치판에 나타난 이색 하객은 단연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었다. 1992년 대선 때 보여준 건강은 아니었으나 남의 부축은 사양한 채 잔치판에 걸어 들어왔다. 모처럼 발걸음은 토지 5부가 현대그룹 연고의 문화일보 연재로 끝났던 인연에다가 틈틈이 생활 방식의 하나로 문학을 사랑해온 취향의 발동이었지 싶었다.
상에 그득 놓은 음식과 함께 잔치판의 막이 올랐다. 여러분이 축사를 했다. 축사는 유머가 담겨야 오히려 무게가 있는 법. 소설가 최일남의 경우가 특히 그랬다. '외로움이 장엄한 밑천'인 작가가 호흡이 긴 글 쓰기를 통해 소설 쓰는 맛을 보여준 것이 거인다움이라 말하고는 인기 유행가를 인용해서 "앞에 서면 무섭고 뒤에 서면 기가 죽는다"라고 치하했다.

마침내 이날의 주인공 작가가 답사할 차례.

"끝났다는 생각이 안 든다. 글은 내가 살아온 자취일 뿐이고 살아가듯이 글을 썼을 뿐인데 이처럼 축하 받을 일인가 싶어 당황스럽다. 잔치 상을 받고 보니 벌 받을 것 같다는 기분도 든다. 이 행사를 당초 반대한 처지에서 마땅히 청해야 할 사람도 챙기지 못했다. 이름도 없이 간단히 '선생님, 고맙습니다' 라고만 엽서에 적어 부담을 주지 않으려던 애독자들에게 답장 한 번 제대로 못한 것이 슬프다. 모두가 어쩐지 슬프다."
소설 제목을 어찌 '토지'라고 지극히 평범한 말로 지었는가. 주위에서 물을 때마다 작가가 들려준 변이 있었다. 자연 그 자체였던 대지의 땅을 놓고 사람이 소유권의 금을 긋기 시작하면서 그만 토지가 되고 말았다는 것. 사람 삶을 속박해온 그 원죄에 착안했다고 한다. 박경리는 1945년에 진주고등여학교를 졸업한 이듬해 결혼해서 1남 2녀를 얻었고 친정어머니도 끼고 살다가 6·25전쟁을 만났다. 전쟁 통에 남편도 잃었던 그 시절을 살아낸 당신의 이야기가 줄거리가 된 소설이 '시장과 전장'이다.
6·25전쟁 직후인가 살아남으려고 리어카도 끌어보았다는 박경리가 붓을 잡은 것도 얼추 그 즈음이었다. 문학으로 포한을 이기려는 결행이었다. 처음 시작에 몰두하고 있음을 엿본 한때 문학 지망생이었던 진주여고 동기가 김동리 소설가 집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그 인연으로 박경리의 습작들을 당대 예술 권력에게 보여주자 오히려 소설에 특장이 있을 거라고 훈수했다.
이 말에 이어 학생 시절에 썼던 단편 '불안시대'가 김동리의 추천을 받아 '계산'이란 제목으로 그리고 본인도 모르는 사이 '경리'란 필명으로 현대문학(1955년 8월)에 실렸다. 이듬해 8월 단편소설 '흑흑백백'이 추천되어 문학 활동을 본격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문단 일원 노릇이 쉽지 않았다. 그 세계의 야박함으로 말하자면 유방암의 고통은 약과였다. 딸이 증언했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기억은 오래전 어느 연말 송년의 어수선함 속에서 고적했던 밤의 통곡이다. 마음 바닥으로부터 치밀어 오르는, 마치 창자가 끊어질 듯, 가슴이 터져버릴 듯 통곡하시던 그 음산한 밤을 나는 잊지 못한다. 그 무렵 어머니는 작가로서는 별처럼 반짝이며 떠오르고 있었고 그것이 질시의 표적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험한 말을 들으셨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상처, 아픔들이 어머니의 스승이었다. 마치 부서져 버릴 듯 통곡하시고 난 다음 어머니는 단정하게 앉아 모질게 원고지 앞에서 펜을 들고 계시곤 했다."
살아내야 하는 시국은 더욱 첩첩산중이었다. 말년에 서사시로 직정을 가감 없이 털어놓았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대/ 사위는 서대문 형무소에 있었고/ 우리 식구는 기피 인물로/ 유배지 같은 정릉에서 살았다/ 천지간에 의지할 곳이 없이 살았다/ 수수께끼는 /우리가 좌익과 우익의 압박을 동시에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인간이 얼마만큼 추악해 질 수 있는가를 / 뼈가 으스러지게 / 눈앞에서 보아야 했던 세월/ 태평양 전쟁 육이오를 겪었지만 / 그런 세상은 처음이었다/ 악은 강렬했고 천하무적이었다."

작가 박완서 "텃밭 통해 생명줄 가르쳐"

박경리는 1994년엔 이화여대가 주는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1996년엔 칠레 정부가 주는 미스트랄 문학 기념 메달을 받았다. 박경리의 만년은 오래 직접 거두었던 외손주들이 남들처럼 대학 들기를 고대하며 애태우는 일 말고는, 토지문화관 꾸리기가 생활의 전부였다. 특히 입주작가들을 먹이는 일에 골몰했다. 텃밭에서 일군 소채로 입주작가들의 먹성 대기에 바쁘다며 "하숙집 주인 신세가 됐다"라고 했다. 그 말 사이로 애살 많은 선생의 흡족함이 얼굴에 완연했고 한 때 입주작가였던 박완서도 맞장구였다.
"제가 단골로 쓰던 토지문화관 삼층 끝 방에서는 선생님의 텃밭이 빤히 내려다보였습니다. 아침 일찍 텃밭을 기다시피 엎드려 김매고 거두시는 선생님을 뵐 때마다 철이 난 것처럼 흙에서 나는 모든 것이 얼마나 소중한 우리의 생명줄인지를 깨우쳐 갔지요."
2007년 8월에 대학에서 정년퇴직한 나는 인사차 그 10월초 원주를 찾았다. 그때 선생은 귀래관 입구의 돌담을 쌓는다며 맨손으로 시멘트 반죽을 주무르고 있었다. 생전에 마지막 본 모습도 그처럼 집념의 일상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조금 전인 7월에 남은 날이 많지 않다는 판정을 받고도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다.
2008년 4월 초, 중환으로 서울에서 입원했다는 소식은 한마디로 놀라웠다. 항상 그렇게 머무를 줄 알았던 언덕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어린이날 방송을 통해 장서 소식을 들었다. 나중에 들은 바로 연명치료를 거부한 채 세상을 떠나기 앞서 남긴다는 사세구 성격의 서사시집 원고는 이미 딸에게 맡겼으나 오복 가운데 마지막 복록인 고종명을 제대로 누린 일대였다.
5월 9일 고향에서 열렸던 장례식은 국상이 따로 없었다. 작가가 졸업했던 통영초등학교 학생들이 애도의 뜻을 담은 원고지 모양의 플래카드를 들고서 장례행렬 길목에 늘어섰고, 통영시 산양면 미륵산 기슭으로 가는 길엔 여중고생들이 흰 수건을 들고 도열해 있었다.

묘비에는 아무 글씨 안 남겨

장지는 이순신의 승첩지 하나인 당포 바다가 저 멀리 보이는 위치였다. 통영시청이 특별히 마련했는데 말하자면 통영의 문화 저력을 기념하는 시립묘역이었다. 당신의 시 '내 모습'은 "내세에는 꽃으로 태어날까/ 나비로 태어날까"로 끝맺는다. 이 시구를 기억했음인지 하관할 때 나비 축제로 유명한 전남 함평군에서 보내온 나비가 든 플라스틱 상자를 일제히 열었다.이전에 무덤 앞 상석에 당신 필체로 '박경리'라고 성명 석자만 달랑 새겼다던데 나중에 다시 가족이 당신 이름도 빼고 그냥 민짜 상석을 놓아 달라했단다. 고사로 치면 아무 글자도 새기지 않는 백비(白碑)를 말함이었다. 더 할 말이 없다는 뜻이었다.

(출판사 기파랑이 출간한 '이 나라에 이런 사람들이'에서 발췌했음.)